팬데믹, 지정학적 갈등, 공급망 병목 사태… 최근 몇 년간 글로벌 산업계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서 세계 각국의 제조업체들이 주목하고 있는 전략이 바로 ‘리쇼어링(reshoring)’, 즉 해외로 나간 생산기지를 다시 자국으로 불러들이는 흐름입니다. 이는 단순한 비용절감을 넘어, 국가 산업전략과 일자리, 기술 자립도까지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변화입니다. 이 글에서는 리쇼어링 트렌드가 왜 다시 부상하고 있는지,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에서 한국은 어떤 기회를 가질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리쇼어링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
리쇼어링은 ‘반대말’인 오프쇼어링(offshoring)과 비교하면 그 흐름이 명확해집니다. 1990년대~2000년대 초반, 기업들은 생산비용 절감을 위해 중국, 동남아 등으로 제조기지를 대거 이전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공급망의 위기가 현실화되면서, ‘값싼 인건비’보다 ‘안정적인 생산환경’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미국과 유럽에서는 자국 산업 보호와 첨단 기술의 해외 유출 방지를 위해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동원해 리쇼어링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유럽의 전략 산업 펀드 등이 대표적인 정책적 배경입니다. 여기에 미중 무역 갈등, 러-우 전쟁, 홍수·지진 등 자연재해까지 더해져 ‘리스크 분산형 공급망’이 핵심 전략으로 떠오른 것입니다.
국내 기업들도 이에 발맞춰 해외 공장을 줄이고 국내 투자 비중을 늘리고 있습니다.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등 전략 산업에서는 R&D와 생산이 분리돼 있었던 과거 방식 대신, 설계부터 제조까지 통합된 클러스터 형태로의 전환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생산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력과 안정성 확보를 위한 ‘산업 생태계 전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조업 귀환이 만들어낼 경제적 변화
리쇼어링은 단지 공장이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고용 창출, 기술 투자, 지역 경제 활성화라는 2차·3차 효과로 확산됩니다. 특히 지방 거점 중심의 스마트팩토리 구축은 새로운 고용 시장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청년층을 위한 기술 기반 일자리를 공급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경북 구미, 충남 천안, 전북 군산 등은 리쇼어링 기업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산업단지를 첨단화하고 기반 시설을 정비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부동산 개발이 아니라, 인력 양성, 교육기관 연계, 데이터 기반 생산 등 새로운 산업 모델을 심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또한 제조업의 귀환은 ‘자동화’와 함께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인건비가 높은 국내 환경에서도 생산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스마트센서, AI 공정 제어, 로봇 설비가 도입되며, 이는 제조업의 ‘고부가가치화’를 가능하게 만듭니다. 즉, 리쇼어링은 낡은 공장의 귀환이 아니라, 새로운 첨단 제조 모델의 귀환입니다.
한국형 리쇼어링의 과제와 기회
하지만 한국의 리쇼어링 현실은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국내로 복귀한 기업 수는 여전히 낮고, 복귀를 망설이는 기업들은 ‘고정비 부담’, ‘복잡한 규제’, ‘부지 확보 어려움’을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단순한 세제 혜택을 넘어, 부지 제공, 전력 인프라 지원, 기술인력 공급 등 종합적인 정책 패키지를 마련해야 합니다.
또한 중소·중견기업에게도 리쇼어링의 길이 열려야 합니다. 현재는 대기업 중심의 전략 산업이 주도하고 있지만, 협력사 생태계가 함께 국내로 들어오지 않으면 진정한 ‘산업 생태계 귀환’은 어렵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바로 클러스터형 유치 전략입니다. 대기업과 협력업체가 함께 입주할 수 있는 인프라와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지속가능한 리쇼어링이 실현될 수 있습니다.
기회도 분명 존재합니다. 글로벌 기업들이 ‘중국+1’ 전략을 추진하면서, 한국은 기술력과 인프라 측면에서 안정적인 대체지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특히 반도체·배터리·디스플레이 분야에서는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거점이 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국가 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리쇼어링은 지금이 아니면 기회를 놓칠 수 있는 ‘전략적 시점’입니다.
결론: 돌아오는 공장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리쇼어링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된 산업 전략이며, 디지털과 친환경을 품은 미래 제조의 시작점입니다. 세계는 지금 공급망 재설계를 통해 위험을 분산하고, 기술 주권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그 한가운데에서 제조업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습니다.
한국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단순한 세금 감면이 아니라, 제조업이 경쟁력을 갖추고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도록 뒷받침할 전략이 필요합니다. 또한 청년 세대에게 ‘공장’이 아닌 ‘기술기업’으로 인식될 수 있는 문화적 전환도 필요합니다.
돌아오는 공장은 과거의 복제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기술, 고부가가치화, 지역 균형발전, 그리고 국가 산업 전략의 핵심축이 될 수 있습니다. 제조업의 귀환은 결국 우리 사회가 다시 한번 산업 기반을 다지고, 미래를 설계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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